골동방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책소개 책추천 북리뷰 서평 독후감 시작합니다.
책소개
“작은 흠이나 실수가 보이지 않”(신춘문예 심사평)도록 세밀하게 서사를 축조한다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문단에 등장한 ‘대형신인’ 명학수가 첫 소설집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을 펴냈다. 사실과 허구를 섬세하게 조합해 놀라운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특유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번 소설집에는, ‘외형적으로 비슷한 작품만 창작되는 시기에 문장과 이야기 면에서 모두 독보적인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호평을 받은 화제의 등단작 「폴이라 불리는 명준」을 비롯한 여덟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특히 놀라운 것은 각 작품에 들어간 작가의 공력이 페이지를 넘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여실하다는 점이다. 명학수는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듯, 마치 세밀화처럼 정교한 짜임새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첫 소설집이 나오기까지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기간 새로운 시도와 자기갱신을 게을리하지 않은 노력 덕분에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은 읽는 내내 단조로울 틈 없이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책으로 탄생했다.
발췌문
P. 14
할머니는 신문에 실린 조그만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그 남자라고 말했다. 앤디 워홀(Andy Warhol).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알파벳까지 외운 첫번째 영어 이름일 것이다. 할머니는 신문과 잡지에서 그에 관한 기사나 사진을 발견하면 스크랩을 했고, 모르는 단어는 사전에서 뜻을 찾아내 영문 옆에 한글로 적어 넣었다. 할머니는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소년의 엄마는 가장의 부재가 남긴 재정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의 상점을 그만두고 급료가 더 높은 일을 찾았지만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는데, 어쩌면 앤디 워홀이 그곳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폴이라 불리는 명준」 접기
P. 46
“햇빛로 32단지 주민들에게 아래와 같은 사실을 통지함. 하나, 햇빛로 32단지에서 기르는 개들 중에 미친개가 있으니 찾아내서 제거하기 바람. 둘, 미친개를 식별할 수 있는 건 햇빛로 32단지에 거주 중인 십대 청소년들뿐임. 단, 그들도 다른 세대의 개만 식별 가능함. 셋, 그들은 타인의 개에 대한 정보를 같은 세대의 구성원은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됨, 법률적으로 타인의 재산권과 명예에 대한 훼손 행위가 될 소지가 있음. 넷, 미친개의 제거는 오직 미친개의 주인만 할 수 있음. 이를 어길 경우 법률적 분쟁의 여지가 있음. 다섯, 빠른 시일 내에 작업에 착수하기 바람. 만약 상황이 조기에 종식되지 않을 경우 적절한 행정조치가 있을 예정임. 본 통지문은 전문가들의 엄격한 감수와 충분한 법적 검토를 거친 후 작성된 것임을 보증함. 작성 및 발신, 국가관리국.”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 접기
P. 114
군 제대 후 십년을 최대한 짧게 요약하려 했지만 쉽지 않다. 차라리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 지랄을 하더니 결국 이 꼴이구나.”
종일 잠만 자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오후에 일어나 찬밥을 물에 말아 휘젓고 있는 내 앞에 달걀부침을 내려놓으며 엄마가 한 말이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다가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듯 책을 펼쳐 들었다. 엄마는 동네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독서모임의 열성 회원이어서 매달 한권씩 책을 읽고 감상을 발표해야만 했다. 식탁에 머리를 처박은 채 밥을 퍼 넣다가 엄마에게 요즘은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책의 제목을 말했다. 나는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엄마 손에 있던 책을 낚아채서 표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신미영 소설집 『은하』.
―「은하」 접기
P. 134
수진이 눈을 뜬다. 하마터면 더 오래 잠들어 있다 기훈과 마주쳐 민망한 꼴을 들킬 뻔했지만 다행히 채 닫히지 않은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수진을 불안한 잠의 기운에서 건져낸다. 주위를 살펴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움직여 자신의 얼굴과 몸을 더듬는다. 청바지의 단추 한개가 풀어진 걸 알고 깜짝 놀라지만 원래보다 작은 사이즈여서 저절로 풀렸거나 자다가 불편해서 무심결에 풀었을 가능성이 떠올라 마음을 놓는다. 다행히 지퍼는 단단히 잠겨 있고 셔츠의 단추도 늘 그랬듯 위로부터 두개만 빼고 모두 채워진 상태이며 진작 벗어던져도 좋았을 양말마저 그대로다. 오전 다섯시에서 7분 지난 시각. 수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얼굴을 살핀다. 끔찍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접기
P. 176
“있을까요? 호수로 가는 버스가.”
그녀의 목소리는 시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켜서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미소만 지었다. 여자와 나는 어깨를 바짝 붙인 채 서로의 보폭과 속도와 방향을 신경 쓰며 걸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 중에는 비와 대지가 만나서 일으킨 물과 흙의 내음이 가득했다. 가벼운 공기와 차가운 물의 기운 속에서 나의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마침내 차도에 이르러 버스정류장이 보이고 몇 미터 앞쪽에 줄지어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을 발견했을 때는 약간 아쉬운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든 정류장의 정면 벽 한복판에 버스 노선도가 붙어 있었지만 무심하게 기어가는 지렁이의 몸뚱이처럼 구부러진 노선 위에 점으로 표시된 지명 어디에도 호수가 연상되는 곳은 없었다.
―「호수」 접기
P. 248
영주와 내가 경마공원에 간 건 백 퍼센트 우연이었다. 원래 우리의 목적지는 서울랜드였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몽환적인 형상으로 떠다니는 흰 구름, 신나는 음악과 온갖 꽃들의 울긋불긋하고 유치찬란한 향연, 그리고 롤러코스터의 비현실적인 질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영주를 그런 것들의 한복판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나흘 전에 영주는 주 2회 수업에 오십을 받던 수학 과외에서 잘렸다. 송파구 방이동에 살던 그들 가족이 용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게 학생의 엄마가 밝힌 사유였다. 영주는 학부모에게 말했다. 용인 어디로 가시느냐고, 수지 정도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학부모는 웃으면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보자고 말했다.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접기
저자소개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수상 :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근작 :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에픽 #07>,<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 총 4종 (모두보기)
명학수(지은이)의 말
해경(海卿)이 눈을 떴다. 그를 깨운 건 어쩌면 어떤 향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생김새를 관찰하고 향을 음미하던 해경은 그것이 한자로 레몬 영(檸)과 레몬 몽(檬)을 사용하는 영몽의 껍질임을 깨닫는다. 입맛을 다시며 영몽의 물기 없는 노란 껍질만 바라보던 해경은 금홍(錦紅)이 그것의 과육을 모두 먹어치우고 껍질만 남긴 것이라 단정한다. 해경은 영몽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1930년대의 경성에서 영몽은 귀한 과일이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백화점과 과일가게와 시장, 심지어 식당과 주점과 찻집까지, 과일이 있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가 물었지만 영몽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경은 온종일 거리를 헤매다 실의에 잠겨 친구의 화실에 들른다. 그곳에서 해경은 마침내 친구의 정물화 속에 그려진 영몽과 조우한다. 허탈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던 해경은 탄식한다. 저건 영몽(檸檬)이 아니라 영몽(靈夢)이로구나.
해경은 우리에게 이상(李箱)이라고 알려진 작가의 본명이며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이상이 정말 영몽을 찾아 경성의 거리를 헤맸는지, 심지어 당시 경성에 영몽이라는 과일이 있기는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까, 저건 거짓말이다. 내가 오직 상상에 의존해서 지어낸 어설픈 픽션이며, 대략 십년 전, 종일 소설만 생각하며 습작에 몰두하던 시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머릿속에 던져진 작은 씨앗이다.